국정화의 첨병, 한국교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일 당시, 폭로된 교육부 TF팀이나 다른 보수 진영 단체의 여러 활동을 제외할 때 유일하게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움직인 집단이 바로 한국교회였다. 카카오톡을 통해 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우고 북한을 찬양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더니 국정화 논란이 일어나는 내내 온갖 다양한 유형의 찌라시를 배포했다.

정확히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1년 전에 화제가 됐던 이승만을 찬양하는 이호 목사의 강연 영상이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박경수 목사가 쓴 '목자의 소리'라는 글은 국정화 고시가 통과되는 날 전후로 기승을 부렸다. 정부가 국정화 고시를 확정한 날, 한국교회 주일 설교 상당수가 국정화에 찬성하는 내용이었다. 일부 교회에서는 국정화 찬성과 관련한 인쇄물이 나눠지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교회의 교황인가. 새누리당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예수를 믿으려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해야 하는가. 목사들은 무슨 권리로 정치 편향성 발언을 일삼는가.

 

목사 중심 구조가 사회적 비난 불러와

정부가 한국사 국정화 고시를 강행한 후, 여론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한국교회는 그들만의 맥락 속에서 몸살을 앓았다. 홍대새교회 전병욱 목사가 MBC의 한 시사프로그램에 나와서 "전별금 13억이 적으면 적었지 많았다는 생각은 안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교회에서 주는 13억이 많지 않다는 주장이다. '내가 복음이다'에 출연했던 삼일교회 관계자는 "우리(일반 교인들) 역시 삼일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개인적으로 초기 삼일교회 성장을 위해 내가 쓴 돈만 해도 2,000만 원이 넘는다. 교회를 떠나게 되었으니 이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참으로 적절한 말이 아닌가.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교회 세습 의혹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상황에서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는 기어코 세습을 감행했다. 최성규 목사가 "하나도 간섭하지 않았다. 이만큼 공정하게 했으면 칭찬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후임 목사 청빙 과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당회가 알아서 아들을 청빙했다는 주장이다. 기껏해야 오비이락이다.

의심과 오해와 비난받을 일은 의식적으로라도 피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바울이 왜 먹는 문제에 그토록 집착했던가. 먹고 마시는 게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곤경을 겪으면서도 성도와 교회를 위해 논쟁하고 싸웠던 것 아닌가. 목회 세습은 누가 봐도 '민망한 일'이다. 일반인을 붙잡고 물어봐도 한국교회를 비판할 때 1호로 언급되는 문제가 세습이다. 목사는 누구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도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지 않겠나.

순복음교회는 장로교단과 달리 목사가 장로를 임명하는 구조라고 한다. 따라서 장로의 권위가 목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교회 구조상으로도 장로교에 비해 재정 등 모든 문제에서 불투명하다고 한다. 장로교는 안전한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교회 운영에 관한 면밀하고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한 때다.

한 목사의 인격에 모든 교회 문제를 의존하겠다는 것은 목사를 타락시키겠다고 작정한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조선시대 왕도 이렇지 않았다. 국가의 모든 예산은 심의 대상이었다. 의정부 고관과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젊은 관원들이 국왕의 정책에 일일이 간섭하며 합의와 토론으로 국가를 이끌어 갔다. 가톨릭은 어떤가. 시노드라는 주교회의의 권한이 분명하지 않은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은 어땠나. 당시 여러 종교개혁 그룹 간에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의 대립도 유명하고, 칼뱅은 신정정치의 한계 속에서도 귀족 민주주의 기원을 열었다고 정치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 작금의 목사 중심 구조는 차라리 김일성주의에 가깝다. 교회사 전통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분이 나쁜가. 그게 아니면 중세 말 로마교회와 비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목사들만 잘못 아냐…성도들의 '순진한 이기주의'도 심각한 문제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고발이 목사를 욕하는 것으로 귀결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목사를 욕하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됐다. 목사들이 문제라고 하는데, 과연 목사들만 문제인가. 최성규 목사가 스스로 밝혔듯 인천순복음교회의 목회 세습은 당회와 교인들의 철저한 동의 가운데 이루어졌다. 국정화 논란 때 유일하게 국정화 반대 입장을 밝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은 장로들의 엄청난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에 다시금 국정화 찬성을 선언하겠다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행보 역시 단순하게 몇몇 목사들의 전횡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목사의 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목사를 맹종하고 교회 관행에 집착하며 오직 그 관행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집단 심성'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목사를 욕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목사 탓, 목사 욕만 하면 뭐든지 해결되는 줄 안다. 목사를 욕하기만 하면 한국교회가 바뀔까.

'가나안 성도' 현상을 심층적으로 따져 본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를 안 나가는 게 대안인가. 교회 안 나가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만인가. 종교개혁이 루터와 칼뱅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얀 후스를 정점으로 하는 보헤미아 지역의 오래된 개혁 전통이 없었다면, 중세 후기부터 진척된 성경 공부와 경건주의 전통이 없었다면, 상공업자들의 직업적 자존감과 문화적 독립성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목사를 욕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성도들의 '순진한 이기주의'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종교의 고유성 지키는 조계종과 역 이름 바꾸려 안간힘 쓰는 한국교회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 가장 능동적인 정치집단이 되어 가고 있다. 2015년 11월 30일 자 <국민일보> 미션라이프를 펼쳐 보라. 1면에 '강남구, 봉은사역명 선호도 조사 다시 한다'는 제목으로 "신연희 구청장 빠른 시일 내 다시 시작하라"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을 연상케 하듯, 조계종은 새누리당과 정면충돌하며 종교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조계종은 유혈 충돌 방지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12월 5일에 있을 2차 민중 총궐기 때 승려들이 직접 나서 '사람 벽'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봉은사역'을 '코엑스역'으로 이름을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코엑스역이라고 하는데, 코엑스가 위치를 옮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 이름은 당연히 해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지어야 한다. 봉은사는 조선왕조 때부터 이 지역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사찰이다.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봉은사역'이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더구나 위와 같은 모양새는 옹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식으로 불교에 시비를 걸면 개신교도가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난다고 보는가.

 

실체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칼을 휘두르는 기독교인들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느낌이다. 유령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반종북, 반북한, 반동성애, 반이슬람, 반박원순…. 이 유령들은 서로 어울리기까지 한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들이 극우파 인사들을 모셔다가 '박원숭이 때문에 한국이 종북이 되었다'식의 포럼을 연다. 대체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 박원순 서울 시장에게 반대하는 것, 종북과 기독교 등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연결될 수 있는가.

이슬람과 크리슬람. 아직 가시화되지도 않는 문제들을 두고 일부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이트에 넘쳐난다. '이슬람을 경계하라', '이슬람이 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이렇게 가면 우리도 프랑스 꼴 난다' 등등.

유럽과 이슬람 세계가 겪어 왔던 천 년의 갈등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이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이 경험한 역사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숙고해 보았느냐는 말이다.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 알제리가 독립을 시도했을 때 프랑스는 십수 년간 알제리인 50만여 명을 죽이고 탄압했다. 프랑스는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알제리가 독립하게 해 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드론 수백 대가 중동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어마어마한 폭격을 쏟아붓고 있다. 파리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애도하는 것과 별개로 기독교도들에 의한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피의 원한을 만들어 내고 있다.

더구나 은행 이자를 제한하는 등, 이슬람 금융은 중세 기독교 전통이나 조선시대 유교 전통과 거의 유사하다. 전근대 고등 종교들이 지향하던 이상향과도 맞닿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모로 숙고해 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이런 맥락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고, 반이슬람 운운한다는 말인가.

막연하게 '공포'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그들은 세상과 대화할 용기가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 그러면서 마냥 자신들이 경험해 왔던 것을 지키고 싶어 한다. 종북이라는 말을 듣고 쉽사리 공포감에 휩싸이고 이슬람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권력에 의지해서 쉽게 칼을 휘두른다. 공포심에 휩싸인 채로 휘두르는 칼. 무작정 내밀어 아무 데나 흔드는 칼. 이런 칼날에 쓰러지는 것은 문제 많은 현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누가 교회에 다니겠으며, 누가 예수를 믿고 싶어 하겠냐는 말이다. 교회의 부정부패 문제를 넘어서 스스로 밑동부터 파헤치고 있는 꼴이다. 최소한 그루터기라도 남겨 둬야 새로운 가지를 키울 수 있는데 말이다.

심용환 /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