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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운영자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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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존 오토버그 지음

 

 

저자 존 오토버그

캘리포니아에 있는 멘로파크장로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수년 동안 시카고의 윌로우크릭커뮤니티교회에서 사역했었다. 플러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범한 소재를 사용하여 비범한 메시지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그는, 이 책에서도 소박한 유머와 다채로운 예화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잔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 월리를 찾아라의 주인공 월리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아담의 창조를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펼쳐 보인다. 첫째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갈망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월리처럼 항상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우리 삶에 매 순간 임재하시며 역사하시는 그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크리스처니티 투데이리더십 저널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내 번역된 저서로는 평범 이상의 삶, 누더기 하나님(사랑플러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야기(좋은씨앗), 우리는 만나면 힘이 납니다(두란노) 등이 있다.

 

역자 김희수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바이올라대학교의 탈봇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거울 속의 아버지, 생각을 뛰어넘는 기도,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적 목회 프로젝트 24(국제제자훈련원)가 있다.

 

Short Summary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치열한 일상의 삶 속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해 손 내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다가가 그 벌어진 틈새를 연결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어떻게 매 순간마다 역동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추상적이거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실제로 깊이 있게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면, 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 성경에서 말하듯이 주님이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면, 왜 우리는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맺기가 한낱 헛된 표어에 지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그분을 간절히 알기 원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오토버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소박한 유머와 다채로운 예화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월리라는 캐릭터와 또 다른 유명한 이미지, 즉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그려 넣은 천지창조중에서 아담의 창조를 통해 저자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펼쳐 보인다. 첫 번째 진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깊은 갈망에 관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그림에 표현된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전력을 다해 우리를 향해 몸을 뻗치고 계신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털끝만큼의 공간만을 남긴 채. 두 번째 진리는 하나님은, 월리와 마찬가지로, 항상 쉽게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매 순간 임재하시며 역사하시는 그분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은 키울 수 있다.

 

저자 오토버그는 이 책을 통해, 가장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찾는 법,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만드는 법, 독특한 경로를 통해서 각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어나가도록 창조되었는지 발견하는 법, 우리 자신의 성령의 흐름에 맞추는 법,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의 위대한 욕망

 

어디에나 계시는하나님

낸시와 나는 유럽을 여행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이탈리아의 시스틴 성당 천장에 미켈란젤로의 하나님과 아담의 그림(아담의 창조)이었다. 분명 미켈란젤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중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다가가 함께하려는 단호한 결의이다. 하나님은 최대한 가까이 계신다.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몸은 느긋한 자세로 뒤로 기대고 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으면 그 간격을 메우리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창조자와 접촉하는 데 무관심하거나 힘이 모자라는 것일까? 손가락 하나만 들어 올리면 되는 데 말이다.

 

이 그림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분은 언제나 기도가 미칠 수 있는 거리에 계신다.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노력,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는 노력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느 곳에서나 말씀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19:1-2).

 

이제 우리 차례이다

쉽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 - 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가슴속에서 하나님이 걸어 다니시는 것을 느낀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께 완벽하게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을 내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우리가 분명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우리 차례라는 것이다. 야곱이라는 사기꾼에게, 엘리사의 사환과 사무엘이라는 어린 소년에게, 엠마오로 향하던 두 낙담한 제자들에게, 로렌스 형제와 병실에 있던 제임스 로더에게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나이나 세대, 기질, 직업에 상관없이. 이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손가락을 내미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월리를 찾아라

 

때때로 그분은 자신을 숨기신다

월리는 한 일러스트레이터(핸드포드)에 의해서 탄생되었다. 월리를 찾아라라는 제목의 이 책은 28개국에서 판매되었다. 이 월리라는 인물은 책의 모든 페이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월리를 찾기 위해서는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월리를 찾으면,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사실상, 월리를 찾아내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 중 하나이다. 때로는 월리를 찾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인내가 요구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찾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포기한다. 핸드포드는 가짜 월리들이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하도록 했다. 당신은 월리를 보면서도 월리인지 모를 수도 있다. 월리는 어디에 있을까? 왜 그는 자기를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는가? 그는 왜 얼굴을 숨기나? 그는 존재하지만, 찾아내기 어렵다. 그는 숨은 월리, 즉 자신을 숨기는 월리다. 당신 삶의 매일, 매 순간이 새로운 페이지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마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쉽게 찾아지는지는 페이지마다 다르다.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끌어당기신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숨기신다.”

 

평범한 날들

때로는 영적 생활에서 일종의 현상유지 상태에 빠지는 시기가 온다. 이 시기에는 큰 위기나 또렷한 문제들도 없지만 크게 얻는 것도 없다. 교회 생활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소 지루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반응은 기도가 아니라 걱정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일 경우가 많다. 우리 삶의 이 페이지 속에도 월리는 존재한다. 우리가 찾기를 잊지 않는다면 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사람들은 요단강이 갈라졌을 때만큼 자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TV 채널 돌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때로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

 

영적 은닉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크게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상당히 선택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변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가 그릇된 일을 하기로 결정하거나 옳은 일 하는 것을 망설일 때마다, 우리는 숨어버린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기도 중에서 가장 많이 드린 기도 -가장 조용한 기도,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기도- 는 바로 이 기도일 것이다. ‘저를 보지 마세요, 하나님.’ 인간이 타락한 후에 가장 먼저 한 기도도 이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거니시기 위해 에덴동산에 내려오셔서 이들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3:9).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었나이다”(3:10). ‘나를 보지 마세요, 하나님.’

 

시간이 지나면 이 기도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인식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삼손의 이야기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남자가 충동을 자제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한 맹세를 모두 깨뜨리게 되는 이야기다. 그의 인생의 말년에 이 슬픈 문장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16:20). 우리의 성격과 영적, 도덕적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구두쇠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비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를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나 은밀히 자기 잇속을 차리는 행위로 인식한다. 냉소적인 삶들은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예단한다.

 

가장 의외의 장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서 불쑥 나타나실지, 누구에게 말씀하실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를 하실지 알지 못한다.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사라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가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권위와 장중함과 힘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임마누엘- 그분은 하나님처럼 보이셨다. 마치 월리의 어벙해 보이는 안경과 줄무늬 셔츠를 입은 것같이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분은 어떤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그분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할 만큼 약했다(53:2-3). 그렇게 하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목수의 직업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책의 모든 페이지에 계셨지만,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모습과 같은 존재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분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다. 그분은 당신이 예기치 못한 곳에 숨어 계신다. 그분은 바로 그 페이지에 있다.

 

인생의 가장 위대한 순간

 

당신 삶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지금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이 지나간 시간 속에 산다면 당신은 삶을 잃을 것이다. 미래는 항상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 만약 당신이 미래 속에서 산다면, 마찬가지로 삶을 잃을 것이다. 이 순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 순간에 계시기 때문에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노라”(118:24). 그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5:15-16)고 말했으리라.

 

변장된 영원

내일이라는 단어는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돈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기쁨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당면하든지 함께 풀어나갈 것을 제의하신다. ‘지금 이 순간의 성만찬을 놓친다면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내일 하지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조건을 정해놓고, 그 조건에 맞으면 멋진 순간들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어 동역하는 위대한 모험은 장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다 자라 더 이상 돌봐 주지 않아도 될 때, 혹은 일에서 받는 중압감이 좀 덜어지거나 우리가 좀 더 훈련되고, 하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동기가 더 커질 때, 또는 영적으로 훌쩍 성숙하게 될 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기만 한 채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는 말은 그분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역사하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에이브러햄 헤스켈은 여타의 많은 종교들은 성스러운 장소를 구별하는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안식일이라는 성스러운 시간을 구별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기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깨어나는가? 당신에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아침형 인간이 아닌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그쳐 아침에 제일 먼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길게 갖기도 한다. 이것이 당신에게 효력이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억지로 아침에 하려고 하지말고, 잠에서 완전히 깬 후, 최대한 빠른 시간에 하도록 계획해 보라. 단 몇 분만이라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하라. 당신이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나는 오늘 하루를 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 것이다. 그날의 근심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당신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다 찾아내어 없애 달라고 요청하라. 나는 자주 하루의 일정표를 펼쳐 놓고 이런 기도를 드린다. 그날을 당신과 함께해 달라고 하나님을 다시 초청하라. 시편 기자는 이렇게 썼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5:3).

 

사소한 일들

어떤 특정한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가령 돈을 지불하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가족들과 인사하는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이런 순간들도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운전을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운전을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평상시 운전하던 속도보다 더 느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운전자들에게 말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신문을 애독한다면, 신문을 읽으라. 신문을 읽되 예수님과 함께 읽으라. 당신이 읽은 것을 그분께 이야기하라. 신문 기사에서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그분께 도와달라고 요청하라.

 

하루를 택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실험을 실제로 해보라. 그냥 당신이 보통 하는 일들을 하라. 단지 그 일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라. 당신이 평범한 하루를 예수님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매일 예수님과 함께 보낼 수 있으리라. 한 번에 하루씩 하라. 우리 시대의 문화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날을 잡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 마음속의 깊은 갈망을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과 날들은, 신문처럼 좋은 뉴스뿐만 아니라 나쁜 뉴스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을 잡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잡을 수는 있다. 언제나 좋은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순간은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장소에 불과하다. 매순간 우리는 그분을 만난다. 지금 시작하라.

 

월리의 후예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은 복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몸은 이 세상을 떠나신다고 해도,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님의 새로운 몸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그분의 존재가 확장된다. 이런 이유에서, 어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말하는데,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사울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탄압하고 감옥에 집어넣는데 열심이었다(9:1-9).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물론, 그때는 이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였다. 분명하게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동일시하신다.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분도 고통당하신다. 사울이 교회에 한 행동은 예수님에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육신을 통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승천하신 후에는 또 다른 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임하신다. 두 번째 성육신인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월리의 후예이다. 물론 월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보다 월리의 후예에게서 하나님을 찾기가 더 어렵다. 하나님은 스스로 다시 성육신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신다. 부동산 중개업자, 은행원, 이웃 삶, 노숙자 등.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진리이리라.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을 위한 포기

얼마 전 나는 해외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호텔에서 무료로 성인 영화가 제공되었다. 그때 여행을 같이 온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내가 성인 영화를 보지 않도록 나를 점검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사실을 말하고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좀 수치스러웠다. 다음날 아침식사 때 그는 나를 보자고 했다. 그는 지난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물었고, 나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잘 걸려 넘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지난밤에 나의 취약점을 먼저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삶에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삶에 나를 사용하셨다. 내 의지로 유혹을 물리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내 미약한 힘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항제가 된다. 그러나 나의 무력함을 깨닫고 내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면, 멕시코 만류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나이다.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포기에의 부르심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욕망을 다 없애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욕망을 창조하셨다. 그분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욕망이란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을 알려 주는 지표이다. 그분이 원래 계획하신 바는 우리의 욕망이 강하고 열정적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이 죄로 인해 타락한 까닭에, 온전한 길잡이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항시 가치 있는 욕망을 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욕망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목마르거든 -당신이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내게로 오라.” 욕망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찾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C.S.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복음서에 약속된 보상의 강력한 법칙을 생각해 볼 때우리 주님은 우리의 욕망이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아신 듯하다우리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겨울의 영성

지구상에서 추운 겨울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 겨울을 피해서 이사 갈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신학자 마르틴 E. 마티는 아내를 불치병으로 잃는 과정에서 가졌던 생각을 담은 책을 썼다. 그가 말하기를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 중 하나는 그가 겨울의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는 온기와 기쁨이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밝은 기질이 그것들을 다시 불러 올만큼 충분하지 않을 때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겨울은 직장을 잃거나 일의 실패를 경험했을 때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겨울은 당신이 부모로서 실패했다고 느낄 때 올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죽는 날 올 수도 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고, 그렇게 열렬히 소망했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일들은 영혼을 냉각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겨울의 최악의 특징은 아니다. 겨울이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부분은 하나님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88:13-14).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것,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야말로 시편 기자가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의 겨울을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다. 영혼의 겨울은 단순히 이런 저런 나쁜 사건이 발생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대답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왜 나를 거절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나이까?”

 

욥과 하나님의 부재

성경의 어떤 책들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수많은 시편들- 은 겨울의 책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욥이라는 사람보다 더 구체적으로 겨울을 나타낸 사람은 없다. 그의 책에서 우리는 월리를 가장 찾기 힘든 페이지를 만나게 된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멋진 삶을 주셨다. 그런데 사탄과 하나님의 논쟁에서, 사탄은 욥의 삶을 파괴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는다(욥이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 욥은 가축과 재산과 하인들과 자식을 잃었다. 그는 슬퍼한다. 그는 경배한다. 그는 소리친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이 모든 행위 속에서, 그는 범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욥은 두 번째 고난의 파도를 맞는다. 이번에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땅에 엎드리지 않는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도시의 쓰레기장으로 가 잿더미에 앉는다. 아마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이리라.

 

욥의 아내는 말한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이 말이 욥에게 격려가 될 수는 없다. 그녀는 욥도 분명히 했을 생각을 소리내어 말한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에 주목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그는 지금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나님은 악을 보내는 그런 분이신가?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가? 저자는 말한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첫 번째 고난의 파도가 지나갔을 때, 본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이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욥은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였다.” 마음속으로, 욥은 번민하기 시작했다.

 

불평이 주는 선물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은 더 나아가 그날이 달력에서 지워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28장에 달하는 글에서 욥은 비통, 혼란, 슬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동요하는 마음을 쏟아놓는다. 그는 하나님이 왜 자기를 버리셨는지 알기 원한다. 욥기의 대부분은 욥이 하나님께 불만을 쏟아놓는 내용이다. 성경에서 겨울의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평을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어떤 범주의 시보다도 불평하는 시들을 더 많이 바쳤다. 그리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유일하게 천지를 창조하시고, 고통에 처했을 때 돌봐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이 고통을 처리해 주시리라는 기대에 기인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기도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해지려고 애쓸 때, 자기 연민이나 순교자적 망상에 빠지지 않고 우리 자신을 순수하게 하나님께 열어 놓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불만을 토로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임재 속에서 다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을 우리 안에 창조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신다. 그러나 우리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오신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프로작(우울증 치료제) 같은 약을 복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프로작이 하나님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이라면? 자존심 때문에 약을 거부하는 것이 그분의 손길을 뿌리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현명한 의사들과 신경세포와 신경전달 물질이 올바로 작용하도록 만들어 주는 약을 통해 임재하실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믿음이 약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도움을 -우리의 무지와 아집으로 인해- 거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욥은 자기가 정말 바라는 바는 하나님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23:3-4). 이야기의 후반부에 욥은 소원을 이룬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38:1). 하나님은 욥에게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 무더기 던지신다. 그 질문들 속에는 욥의 질문에 대한 실제적인 답은 없지만,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과 섭리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38:25-27).

 

하나님은 아무 대가 없이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분의 관대함은 제한이 없다. 하나님은 아무 쓸데없어 보이는 동물들을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베푸시고, 기뻐하신다. 왜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사랑하셔야 할까? 앤 달라드는 이렇게 적었다. “조물주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장 하찮아 보이는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즐기신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정작 이것이다.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생명들아, 나를 따르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포기하지 말라. 이 고통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까이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선하시며, 무한히 관대하시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무 대가없이 그냥 베푸실 뿐이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신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분을 매혹시키기 위해 창조되었다

겨울이 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욥은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하나님이 몸소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겨울에 오셨다. 예수님은 욥과 같이 질고를 아는 자”(53:3)로 알려지셨다. 그분은 슬픔에 익숙하셨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나님은 잿더미 위에 계셨다. 그분은 욥처럼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셨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 그분은 몸소 하나님의 부재라는 겨울을 겪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27:4). 십자가 위에 최고의 역설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상실과 슬픔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린 것을 통해서까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있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같이 몸소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체험을 하셨을 때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본 적은 없으리라. 카를 바르트(스위스의 개혁교회신학자)하나님은 축복받지 못한 백성의 축복받은 하나님이 되기보다는 고통 받는 백성의 고통 받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위대한 기적에 대한 글을 썼다. 지금이 당신의 인생에서 겨울이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다면,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잿더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와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셨다. 어쩌면 그분의 고통이 그분의 영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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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운영자 2020.04.23 0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