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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기도 운영자 20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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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기도

래리 잭슨 지음/ 주지현 옮김

예수전도단/ 2004/ 174

 

저자 래리 잭슨

래리 잭슨은 노스캘로라이나 주의 파예트빌에 위치한 클리턴 인터내셔널 교회의 담임 목사이며, 또한 인터내셔널 교회 협회의 이사와 프라미스 키퍼의 의장직을 맡고 있다. 아내 조안드라와 다섯 명의 딸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역자 주지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졸업, 예수전도단 열방대학에서 선교사훈련 과정을 수료한 뒤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알타이 공화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열정을 다해 교회개척과 제자훈련 사역을 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북방소수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

 

Short Summary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래리 잭슨 목사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난 예언으로부터 중보기도자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성경적 원칙을 정제했다. 이 책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 되시고 죄인 중 하나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중보자가 기도하는 대상의 자리로 내려가 일체감을 갖는 '동일시 기도(Identificational Prayer)‘에 대해 나누고 있다.

 

차례

1장 새롭게 배운 원칙

2장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한 결과

3장 그리스도와 동일시기도

4장 산고를 통해 해산함

5장 죄인의 자리에서 이탈하기

6장 결렬된 틈 사이에 서는 법

7장 결렬된 틈에 머무르기

8장 죄인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법

9장 연약함을 함께 맛보다

 

들어가는 글

1990년 여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버지니아 비치의 호텔에서 칩거하며 혼자서 조용히 사역을 정리할 때였다. 갑자기 예수님의 고난을 연구해야겠다는 갈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그 때는 이미 부활절이 한참 지난 때여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인간이 되어 죄인의 하나로 취급받으신 예수님의 고난(53:12)에 대해 왜 하나님이 관심을 갖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하자,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심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역을 새로운 관점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말씀을 계속 읽어갈수록 깨달음의 정도도 더해갔다. 난생 처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이 중보기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수 년 동안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팀을 인도하던 틴덜 수녀 등 여러 자매가 기도 시간 동안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경험 덕에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을 중보기도와 연관시킬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령님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정확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예리한 칼날처럼 사용하신 말씀은 이사야 53장이었다. 거기서 이사야는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굽어보았고,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자신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낮추고 인간의 죄악을 대신해서 고통받으시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사야 5312절 말씀의 후반부가 송곳처럼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미워하면서 죄인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과 달리 우리 자신을 다른 죄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범죄자를 기피하는 것이 사실이며, 분명 사람 앞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자체도 꺼려한다! , 죄만 역겨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혐오스러워 한다! 칩거 기간 동안, 과연 그런 태도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인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그러면서 결론을 얻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고, 또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 받았던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죄인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심각한 죄에 사로잡힌 우리의 기도 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증오가 아닌 사랑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가르침이나 경책의 목소리도 결코 흘려듣지 않을 것이다.

 

1장 새롭게 배운 원칙

부르심을 받기 전에, 나는 NEC(국영 교육 기관)에서 전자공학을 가르쳤다. 당시 나는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천국이 어떠한지를 열심히 얘기하고 다녔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굳이 강요하지 않았지만, 또한 다른 누구도 내 생활 방식이나 선택에 참견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미국의 교회는, 짐 배커 목사가 헤리티지 재단과, 개인적으로 아는 몇 사람에게 사기를 행함으로써 수백만 달러를 탈취한 사실 때문에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었다. 최악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TV 방송전도자가 스스로 죄에 빠진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배커 목사의 사건 이후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지미 스워거트 목사의 사건이 터졌다. TV에 나와서 미국인의 도덕성 쇠퇴를 경고했던 목사가, 다름 아닌 바로 성적인 죄에 빠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꽤 성공적인 사역과 결혼생활을 영위하던 목사가 죄를 저질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궁금증을 가졌다.

 

지미 스워거트 목사의 사건이 대서특필된 지 며칠 후 어느 날,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내게 다른 동료들이 함께 식사를 하려고 다가왔다. 그리고 국내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 TV 전도자들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날 친구들에게 해준 나의 답변은 전세계 교회가 자주 사용하는 문구다. “하나님은 그래도 하나님이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와중에도 끝까지 존속하지. 지미 스워거트 목사에게 집중하는 대신 자신의 영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나을 거야.” 이 말에 동료들이 흠칫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제대로말해줬다는 확신을 안고 식당을 나왔다.

 

칩거 기간 동안, 나는 이 일을 다시 생각했다. 동료들을 마구 야단치면서 자기만족에 빠졌던 나의 모습에 반해, 이사야 53장에 나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 중 하나로 여기셨다! 내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와 다른지 깨닫는 순간, 아픈 마음과 함께 회개의 기도가 내 입술을 채웠다. 성령님은 그 날의 기억을 사용하셔서, 성경이 말씀하는 중보기도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하고자 하는 큰 결단을 내리게 하셨다.

 

나는 그 당시 가족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파예트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새롭게 계시하신 죄인의 자리에 서는 기도로 단단히 무장한 나는, 맡고 있던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 새로운 중보기도 원칙을 가르쳤다. 냉담했던 청취자들은 이 말씀에 커다란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나는 아주 희한한 경험을 했다. 나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부터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것은 내가 겪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며 어떤 원칙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 경험을 나누는 이유는, 그 동안 나와 같은 중보기도자들을 만나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는데, 내 얘기를 듣고 안도감을 느꼈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 무렵, 나는 라디오 방송 사역을 그만 두고 모든 시간을 교회 개척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중보기도로 저녁 예배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중에 느닷없이 내가 동성연애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즉시 기도를 멈추고 무슨 일인지 살펴보았다. 나는 한 번도 성적인 문제로 갈등한 적이 없거니와,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은 극히 행복했다. 동성연애자의 느낌이 아주 생생했기에 처음에는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어쩌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그런 문제를 겪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 사람이 동성애의 묶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느낌을 주셨다.

 

그전에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교인이 느끼는 고통을 몸소 체험하는 경험을 자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저 깨달아 알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교인 앞에서 그 깨달음을 말하라는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두렵지만 순종했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경험을 했다.

 

어쨌든, 그 날 경험한 동성애의 느낌은 실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대신해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날 저녁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동성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예배에는 외부 방문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당황한 나는 그 날의 느낌을 도저히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없던 것으로 넘겼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다른 지역에서 기도모임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그 느낌이 왔다. 지난번처럼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무슨 일인지 깨닫게 해주시길 간구했다.

 

그 때, 성경 말씀 두 가지가 떠올랐다. 이사야 53장과 로마서 8장 말씀이었다. 그리고 마치 봇물 터지듯이 새로운 깨달음이 내 영혼을 가득 메웠다. 하나님은 그 날의 기도 경험을 통해 몇 달 전에 가르쳐 주신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셨다. 바로, 죄인의 자리에 함께 서서 그들과 그들의 생활양식을 인정하며 중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대다수가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동기와 계획은, 이를 경험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드러날 만큼 위대했다.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이 차츰 내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너를 훈련하기 위해서 동성애자처럼 느끼도록 허락했다. 너는 그들을 이해하는 유리한 위치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또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믿음으로 진실하게 기도하며 울부짖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 위에서 다른 사람의 죄악 때문에 죽임 당하는 과정을 겪으시며,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자행되는 모든 사악한 일을 직접 경험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 인간의 몸을 입은 성육신을 통해 그리스도는 죄인의 자리에 이르셨다. 예수님은 천사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영광으로 옷 입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이 지금껏 당해 왔고 앞으로도 당할 모든 아픔을 죄다 경험하기로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죄인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잡수시는 것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부정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고,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나 있냐고 비난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듯 살아갔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죄 많은 여인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육체를 가진 다른 사람과 자신을 기꺼이 동일시하셨다.

 

기도의 더 깊은 수준을 깨닫게 되었기에, 중보기도의 원칙을 교회에 가르치고자 하는 나의 열정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죄인의 자리에 서는 기도원칙이란 그저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계시라고만 오랫동안 생각했다. 기도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 원칙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하는 가족의 삶과 태도가 바뀌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는 고백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이 원칙대로 기도하면, 그 원칙은 즉시 입증되었다.

 

2장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한 결과

대부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힘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서는 기도원칙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은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유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단 우리가 이 기도의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면, 기도생활이 즉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끌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충분한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특히 기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과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식구들이 변화되려면, 하나님을 아는 다른 가족이 이러한 기도의 수준으로 충분히 중보할 때에야 가능하다. 자신의 중보기도에 이러한 원칙을 적용한 사람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 이와 같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5:16).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비탄과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이 그 곳에 계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다. 우리가 죄책감과 비탄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고통은 그 이 일이 있기 몇 천 년 전에 이미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되었던 것이다. 예언자들과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기대하며 이사야서를 연구했으며 베드로서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큰 유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이사야서를 연구했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죄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고, 대신 예수님께 속한 모든 것(죄 없는 인간)을 우리에게 주셨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감당해야 할 모든 저주와 비난과 죄책감, 외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감싸 안으셨다. 그리고 대신 구원과 건강, 스트레스를 주는 내적 문제로부터의 자유, 기쁨, 교제로 바꾸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풍성한 유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경험하신 모든 것 안에는 불변의 목적이 숨겨 있다. 갈보리의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구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할 것이다. 죄란 우리를 영원한 지옥으로 이끄는 몰이꾼이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구원이란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바치셨다.

 

예언자들의 예언처럼, 우리는 하늘의 보화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논의되는 보화(원칙)를 찾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찾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보화를 찾을 수 있는 지도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님이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시도록 내어드리라.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곧 하늘의 풍부와 보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다.

 

오늘날에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억압과 고통 속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한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당하는 연약함과 영적인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셨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고통을 통해 얻는 능력을 깨닫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은 고난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를 위해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것은, 모든 고통은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사탄의 권세 아래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이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있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뢰하라는 의미다. 고통의 상황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3장 그리스도와 동일시 기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이유는, 단지 예수님이 엄청나게 많이 기도하셔서가 아니라, 그분의 열정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이나 내용을 가까이에서 접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죄인과 동일시하셨기에,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할 사람의 위치에서 대신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기도의 효과는 참으로 명확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길 바랐다. 그것은 기도의 힘이 한 사람의 인생 문제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보여주는 산 증거였다.

 

교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모든 사람은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도 불법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 전체를 위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영혼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구원하셨다. 사탄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이 취할 수 있도록 헌신하고, 사람을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풀어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방해물을 제거해야 한다.

 

죄인의 자리에 사는 것은 힘겨운 상황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중보기도 방법이다. 그들 스스로 원할지라도, 결코 원수의 손에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회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회복할 수 있다.

 

기독교 음악가인 케빈 맥대니얼은 나의 중보기도 강의를 듣던 중, 수 년 동안 여자와 마약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버지와 동일시하며 기도해야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보기도의 영이 나를 엄습했고 나는 정말 내 아버지가 되었다. 눈앞에는 포르노가 어른거렸고, 입에서는 술맛이 느껴졌으며, 마약에 취한 듯했다. 고통과 고뇌와 추악한 죄악의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마음 깊이 죄책감을 느꼈기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똑바로 사세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야 왜 아버지가 그렇게 사실 수 없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껏 스스로 경건하고 대단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마치 나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으니 당신을 위해 기도해 드리죠라고 말하는 권위적인 종교인이었던 것이다.”

 

케빈이 자신도 역시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서, 의로운 자의 위치가 아니라 죄로 고통당하는 아버지와 동일시하며 기도하기로 형과 함께 결심했을 때에야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또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4장 산고를 통해 해산함

이사야 5311절에 보면, 새로운 개념이 소개되고 있다. ‘해산의 고통이란 주제가 나오는데, 특히 성부 하나님이 아들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볼 수 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이 기도로 진통을 겪으시며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는 모습을 보고 만족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의 영혼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온전히 맞추기 위해 열렬히 기도에 힘쓰셨다. 복음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기술하면서, 세상 모든 인류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깨닫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분의 마음 상태에 대해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신 말씀과 그분의 땀방울이 피같이 되어 떨어졌다는 사실은, 아들의 영혼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 5311절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분의 영혼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다. 인류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을 간구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무려 3시간 동안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뇌의 고통을 받으셨다! 너무나도 힘겨운 시간이었기에 예수님은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성취하도록 제자들이 옆에서 함께 기도해주어야 한다고 느끼셨지만 육신이 연약했던 제자들은 그냥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돕도록 천사를 보내셨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산고의 기도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는 어떤 식으로 아이를 임신하는가? 그리스도의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마음 밭에 심겨진 비전으로 임신하게 되고, 이후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출산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라고 말한다. 베드로 사도도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한다고 말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처럼 교회는 귀로 들음으로써 임신하고 입술로 그 말씀을 고백함으로써 해산하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마땅히 행해야 한다. 선택된 몇 사람만이 기도로 우리와 잃어버린 영혼을 중보해야 한다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전쟁에서 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교회는 어쩌다가 영적 민감성을 상실하게 된 것일까? 우리가 안 보는 틈을 타서, 우리의 적인 사탄이 교회의 등에다가 점진주의라는 진통주사를 꽂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솥에 앉아 있다가 서서히 삶아져 완전히 죽고 마는 개구리처럼 사탄은 교회가 점차로 무감각해지도록 서서히 가열해서 자신의 사악한 계략을 이룬다.

 

이제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교회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밀어내야할 때가 되었다. 다른 이를 대신하여 고통을 감수하셨던 주님과 동일한 마음을 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무장할 때가 되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던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 이 구절을 보면 바울은 교회 안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해산의 고통을 통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인 우리는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해산의 자세에 임해야 할 것이다.

 

5장 죄인의 자리에서 이탈하기

현대 교회가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일 자세가 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나는 이 모습을 죄인의 자리에서 이탈하기라고 부른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죄에 빠진 사람과 철저히 구별하기 때문에, 죄인들은 외롭게 홀로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일이 잘못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모든 관계와 교제를 박차고 이탈하는 경향이 있음을 안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스스로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죄인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가족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것만큼 끔찍한 경우가 없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피해 주변의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지낸다. 또 어떤 흑인은 미국 내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 사는 흑인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백인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혼자서 이탈하는 태도는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그것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바로 교만이다. 사탄은 교만의 아비다. 이탈자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를 쓴다. 현대 교회 역시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는 데에 아주 뛰어난 선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죄인의 자리에 서는 원칙이 무엇인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두 가지 좋은 기회를 주셨다. 첫 번째는 짐 베이커 목사의 사건이고, 두 번째는 지미 스워거트 목사의 부정 사건이다. 이 두 사람이 죄에 빠진 사건을 대할 때, 동일시하지 않고 배척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 1장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교회는 그 사건과 무관하다며 최대한 발뺌하려고 했다. 심지어는 이보다 한 술 더 떠서,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 두 형제를 공격하는 공식 대표자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을 이용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의 모든 책임은 그 두 목사와 그 가족,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의 어깨에 모조리 넘겨진 것이다. 단지 죄인을 심판하며 손가락질 해대는 것을 나단 선지자의 역할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단 선지자는 아무도 다윗 왕의 범죄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예언자의 권위를 가지고 다윗에게 조용히 찾아가 과감히 죄를 지적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는 방법, 이탈하지 않으면서 계속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6장 결렬된 틈 사이에 서는 법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않을 권리가 있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역자를 중보하시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서셨다. 중보기도자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의 갈라진 틈 사이를 막아서고, 그 사람을 대신하여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이다.

 

에스겔 223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이사야 5916절 역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중보기도자의 자리에 설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중보기도자가 되셨음을 나타낸다.

 

죄인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의 틈에 서기 위해서는, 죄가 없음에도 기꺼이 죄인과 동일시하는 대가를 치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 속에는 여러 곳에 걸쳐 이 원칙이 드러나 있다. 모세가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기꺼이 큰 대가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또한 히브리 청년이었던 다니엘의 중보 역시 좋은 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니엘이 죄 많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결렬된 틈 사이에 섰기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의로운 느혜미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1:6). 신실한 제사장 에스라도 결렬된 틈에 서서 하나님 앞과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울며 엎드렸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 보자. 여기서는 사도 바울이 결렬된 틈 사이에 선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1-3).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대신 지옥을 가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이다!

 

결렬된 틈 사이에 서는 중보기도자의 가장 뛰어난 모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2)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4)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5)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결렬된 틈 사이에 서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찬 식탁에서 잔을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22:37). 예수님의 보혈의 피만이 죄를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피를 의지해 죄인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7장 결렬된 틈에 머무르기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 가운데 끈덕지게죄인의 자리에 남아 있으려는 사람이 적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죄인의 자리에 서서 기도하는 방법을 이해하게 된다 해도 산고의 고통이 느껴지면 어느새 이탈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이 느껴지면 언제든 뛰쳐나갈 만반의 준비가 된 존재이므로 항상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이러한 성향은 인류가 타락할 때, 에덴동산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남의 책임까지 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전에 지미 스워거트 목사 사건을 놓고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함께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교회를 방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에게 그런 임무를 맡긴 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스스로 잘 하려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의 교회를 잘 보살피실 수 있는 분이다.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그 사실만으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열정보다 뛰어남을 증거한다.

 

둘째, 베커 목사와 스워거트 목사에 대한 문제를 떠벌렸던 나와 많은 다른 이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하나님은 한 번도 나에게 하나님을 지켜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가지셨다.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그분은 우리를 쉬지 않고 지키신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죄를 드러내신다. 인간은 시련과 계시를 통해 성장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문제가 발생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의 몇몇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나? 그리스도인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몸의 한 부분인 눈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죄를 범했을 때, 몸의 다른 부분은 무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몸의 한 부분이 죄를 범하면, 다른 모든 부분도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지체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주저 없이 잘라버린다는 것은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탄의 공격을 받고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무기력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을 홀로 버려둔 채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구경했다. 사향소는, 부상 입은 동료를 보호하면서 단체로 적과 싸우는 습성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으면 전체 무리가 둥그렇게 뒤를 맞대로 둘러서서 암컷과 새끼들을 감싸며 원을 만든다. 그런 다음 수컷 한 마리가 적과 한 판을 벌이기 위해 앞으로 돌진하여 완전히 지치거나 부상을 입을 때까지 싸운다. 그리고 다시 둥그렇게 둘러선 무리에게로 돌아오면, 암컷과 새끼가 머무르는 원 중심에 함께 머물 수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수컷 한 마리가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식으로 적이 패하거나 도망갈 때까지 계속해서 싸운다. 교회도 이러한 전략으로 찢겨진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이것이 회개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성경의 방법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5).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대표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우리가 태어난 가족을 대표하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변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8장 죄인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법

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전도했던 방식을 살펴보면서, 현대의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먼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성도들이 하는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11장과 18장의 비유를 사용하여,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고 공급받을 때까지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11장의 비유에서 보면, 여행하다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줄 음식이 없자 옆집에 찾아가 성가시게 하면서 문 앞에 서서 강청했던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필요를 위해 간청하고 있었다. 18장의 비유에서 보면, 어려움에 빠진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 앞에 공정한 재판을 부탁한다. 이 과부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위해 서 있었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가 처한 경우는 물론 이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재판관은 정의로우시며,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 깊이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오실 때 이 땅에서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는 질문이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문앞에 서서 계속 두드리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이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응답을 받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를 채워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확신하며 나아가면, 응답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간구했던 것보다 훨씬 놀랍고 확실한 응답이 올 것이다.

나는 검프처럼 행동하기’(Gumping)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이 말은, 비록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구출해 내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자의 자리로 들어가고, 혼자 대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때, 우리는 검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도울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도와주려는 태도를 우리는 지녀야 한다.

 

9장 연약함을 함께 맛보다

이사야 53장과 로마서 8장은 몇 가지 궁금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한 후 깨닫게 된 성경구절이다. 이 중, 이사야서는 이미 검토했다. 이제는 로마서 8장을 통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러한 말씀을 주셨는지 살펴보자. 로마서 822-26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해 모든 피조물이 마치 산고를 겪듯이 탄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뿐 아니라, 교회 역시 하나님이 이 땅 위에 그분의 일을 완성하시고 그분과 영원히 살게 될 본향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고통한다고 설명한다. 성령님 역시 탄식하는 중보기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통해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로마서 826절을 보면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이 이렇게 행하시는 것이다. ‘연약함이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무기력하게 만드는 여러 약점을 포함한다. 성령님께 모든 기도 시간을 맡겨드리면,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도우신다. 로마서 151절을 보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실패와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성령님만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서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성령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어떤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우리도 동일하게 느끼게 해주셔서, 그 사람을 위해 더욱 열렬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아이를 낳은 여성처럼, 감정(고통의 느낌)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는다. 아이를 낳는 여인은 산통을 느끼면서 이제 힘을 주어야 할 시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인이 산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이제는 힘을 줄 때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과 환경의 문제를 나와 동일시하려면,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만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너무 의지하지는 않아야 한다.

 

성령님의 탄식은 통렬한 부르짖음이다. 하나님께는 엄청난 탄식이지만 인간에게는 왠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아이를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은 극에 달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그 부르짖음과 신음소리가 잘 이해되지도 않고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고통이 클수록 해산은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기도도 이와 동일하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탄식하기 시작하면, 기도의 응답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열심을 다해 중보한 뒤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은혜의 기도에 초점을 맞춰라. 그러면 성령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긍휼한 마음을 가득 부어 주시게 되고, 기도는 즉시 더욱 열정적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이제 더 이상 이 자리를 떠나지 말고, 과감히 죄인의 자리에 함께 서지 않겠는가? 당신이 과감히 그 자리에 서게 된다면, 기도의 응답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 기쁨 또한 충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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